현대자동차 금속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

민투위 연혁

 

1987년 7월 25일 - 현대자동차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공장이 모두 그랬듯 새로 설립된 노동조합은 민주노조가 아니었다. 따라서 초기 현장 민주세력은 노조민주화투쟁부터 시작했다.

 

1988년 7월 24일 - 노조민주화를 위해 현장에서 투쟁해왔던 20여명의 활동가들이 '민주노조실천노동자회'(민실노)를 결성했다. 민실노는 90년 4.28 연대투쟁을 주도적으로 벌여냈다. 한편 현장에서 학습소모임 등을 결성해 활동해왔던 또 다른 활동가들은 5.28 정상조업 반대투쟁을 벌여냈다. 4.28 투쟁과 5.28 투쟁 주체들은 6월 26일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를 결성했다. 노민추는 6월 30일 불신임투쟁을 벌여냈지만 65.9% 득표로 162명이 모자라 이상범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투쟁에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노민추는 현장에서부터 새롭게 노조민주화투쟁을 벌여내면서 '현대자동차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를 추동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1991년 5월 - 명지대 강경대 학생과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의 사망을 계기로 5월 투쟁이 벌어졌다. '현대자동차 구속·해고 동지회'(구해동), 노민추, 공소위, 민대, 현대자동차 풍물패 연합이 모여 '현대자동차 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를 결성했다. 현연투는 5월 투쟁에 연일 4∼5천명의 조합원을 이끌고 반노태우 반민자당 거리투쟁을 힘차게 벌여냈다. 그리고 광역의회 선거투쟁과 '저시급 대표자회의'를 추동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내면서 91년 9월 3대 이헌구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1991년 10월 - 현장 활동가들이 대거 상집으로 올라간 공백을 메꾸며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회'(민노)가 결성되었다. 조합원의 열망을 한몸에 받아 안고 출범한 3대 이헌구 집행부는 출범하자마자 총자본의 집중탄압을 받았다. 도자기 투쟁을 거쳐 연말 성과분배투쟁에서 3대 집행부는 총자본과 운명적인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1992년 1월 21일 - 공권력과 전면대치중 피눈물을 흘리며 퇴각하는 와중에 서영호 열사를 잃었다. 성과분배투쟁으로 500여명이 구속·수배·징계되는 최악의 조건에서 민주활동가들은 이재인 장외직대체제로 노조를 정상화했다.

1992년 6월 - '현대자동차 범민주투쟁연합회'(범민련)를 결성, 8월 4대 윤성근 집행부를 탄생시켰다.4대 집행부는 93년 현총련 공동임투를 힘차게 벌여냈지만 마지막 순간 김영삼정부의 긴급조정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임투를 마무리했다.

 

1993년 - 5대 임원선거에서 민주세력은 범민련(정갑득)과 노발연(김강희)으로 분열하여 이영복 후보에게 패배했다.

 

1994년 2월 - 현장 공백과 민주세력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의 길'(노길)이 창간되었다. 노길은 이영복 집행부 하에서 현장조직이 없던 시기에 민주세력을 묶어냈던 유일한 틀이었다.

 

1995년 5월 12일 - 양봉수 열사의 분신투쟁이 벌어졌다. 현장 활동가들은 이 투쟁의 성과를 모아 6월 '양봉수 열사 정신계승을 위한 실천투쟁위원회'(실투위), 8월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를 결성함으로써 오랜 공백을 뚫고 현장민주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6대 정갑득 집행부를 압도적인 지지로 출범시켰다. 1기 민투위 의장단은 의장 정갑득, 부의장 김경석, 사무장 배만수 동지였다. 6대 집행부가 출범하고 11월 새로 꾸려진 2기 민투위는 의장 김경석, 부의장 황종하, 사무장 채규정 동지를 의장단으로 하여 활동했다.

 

1996년 3월 - 현대중공업 전노회,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 남연추 등과 함께 울산지역 현장조직 대표자회의가 결성되었다.

1996년 6월 - 3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이재인, 부의장 황치수, 사무장 김영배 동지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10월 노개투 울산지역 선봉대 활동을 전개하고 12월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을 힘차게 벌여냈다.

 

1997년 1월 10일 -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 과정에서 정재성 동지가 분신했다.

1997년 6월 - 민투위와 노길이 통합하여 4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배만수, 부의장 이덕기, 사무장 홍영기 동지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1997년 8월 - 7대 집행부 선거대응에 대한 조직적 결정에 따를 수 없다면서 정갑득 동지 등이 민투위를 탈퇴하여 이후 '현대자동차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를 결성했다. 7대 임원선거에서 민투위가 승리하여 9월 김광식 집행부가 출범했다.

 

1998년 3월 - 5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이상욱, 부의장 지진성, 사무장 김주희 동지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5기 민투위는 민주노총 2기 임원선거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5월 고용안정 관련하여 소책자 발간, 홍보투쟁 등 민투위 독자 투쟁을 힘차게 전개했다.

 

1998년 7월 정리해고 반대 파업투쟁이 벌어졌다. 8월 24일 김광식 집행부가 정리해고 최소화로 잠정합의했다. 민투위는 휴대위와 더불어 부결투쟁을 벌여내 잠정합의안을 부결시켰다. 7대 집행부 다수는 이 때 민투위를 탈퇴하여 이후 미래회를 결성했다.

 

1998년 10월 - 6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하수봉, 부의장 심재근, 사무장 홍용구 동지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조직원의 70% 이상이 정리해고, 무급휴직을 당한 상태에서도 민투위는 1999년 2월 금속연맹 2기 위원장 선거 조돈희 혁신 선대본에 결합했고 3월 금속연맹 울산지역본부장 선거 황종하 선대본을 꾸려 선거투쟁에 임했다.

 

1999년 5월 - 임원선거에서 8대 실노회 정갑득 집행부가 출범했다.

1999년 6월 - 7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전규석, 부의장 유홍렬, 사무장 김태곤 동지가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1999년 12월 - 8기 민투위가 의장 전규석, 부의장 강병태, 사무장 김태곤 동지를 의장단으로 새로 출범했다.

 

2000년 2월 - 민주노총 울산지역 본부장 선거 조돈희 선대본에 결합하여 선거투쟁을 벌여냈고 3말 4초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 저지 총파업 투쟁과 6.8 울산시의원 보궐선거투쟁을 힘차게 전개했다.

 

2001년 2월 - 9대 임원선거에 이상욱-윤해모-김태곤-최정열-김주희 동지를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시켰다.

2001년 3월 - 의장 강성신, 부의장 김기수, 사무장 김기선 동지를 의장단으로 선출하고 9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2001년 대우차 정리해고 철회투쟁, INP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조합투쟁, 효성/태광투쟁 등 지역과 전국의 주요 투쟁에 적극 결합, 연대투쟁을 벌였다.

 

2001년 9월 - 10대 임원선거에 이상욱-윤해모-최정열-황종하-류인목-김주희 동지를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투쟁을 벌였다.

2001년 10월 - 의장 강성신, 부의장 허성관, 사무장 김기수 동지를 의장단으로 선출하고 10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2002년 6월 - 6.13 지방선거에서 류인목, 현진경 동지를 후보로 내세워 선거투쟁을 벌였고 양정동에서 류인목 동지가 북구의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10월 - 11기 민투위가 의장 김태곤, 부의장 박상철, 허성관, 사무장 김기선 동지를 의장단으로 하여 출범했다.

 

2003년 - 현장조직의장단회의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군의 파병을 반대하는 반전 피켓시위를 조직하고, 현장제조직 노동안전 담당자회의와 산별, 비정규직 등 정책담당자회의를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2003년 2월 - 강성신 동지를 민주진영 단일후보로 민주노총울산지역본부장 후보에 내세워 힘찬 선거투쟁을 벌였으나 투표자 수의 과반 여부와 연장투표 여부를 놓고 지리한 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선거 자체가 무산되었다. 한편 16대 대의원선거과정 및 1공장 대의원대표 선출과정에서 조직원총회 결의를 위반한 이유로 조용형, 이진윤 동지를 비롯한 14명의 동지들이 제명되었다. 이 동지들은 탈퇴한 이한부 동지 등과 함께 고용사수투쟁위원회(고투위)를 결성했다. 그리고 김기수 사무장도 탈퇴하여 사무장 직대로 전규석 동지가 선임되었다. 고투위는 다시 분리되어 공작사업부를 제외하고 모두 동지회로 흡수되었다.

 

2003년 3월 - 민투위 사무실에서 근골격계 공개검진을 실시하였고 4월 집단요양투쟁을 벌여냈다. 이 투쟁의 성과로 비정규직을 포함한 28명 집단요양신청자 전원에 대한 산재승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투쟁으로 5월 김태곤 의장, 손덕헌 노동보건부장, 김성민 간사 등 3명이 구속되었다.

 

2003년 9월 30일 - 12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허성관, 부의장 주재일, 최윤석, 사무장 전규석 동지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2003년 12월 - 11대 임원선거 투쟁에 민투위 후보인 위원장 이상욱, 수석부위원장 김태곤, 부위원장 정창봉, 김동원, 사무장 박성식 동지가 당선되었다.

 

2004년 1월 12일 - 근골격계 투쟁으로 구속된 김태곤 동지와 김성민 간사가 만기 출소했다.

2004년 1월 29일 - 사무장 전규석 동지의 노동조합 상무집행위 피선으로 이경호 동지가 사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2004년 9월 23일 - 13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강성신, 부의장 윤해모, 고도일, 사무장 권병석 동지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2004년 12월 - 18대(직선2기) 사업부 대표선거에 1공장 강성신, 3공장 허성관, 엔진 윤해모, 소재생기 황종하 동지가 출마하여 강성신, 윤해모 동지가 사업부대표로 당선되었다.

 

2005년 2월 - 11대 집행부 조직강화팀장인 전규석 동지가 금속연맹 울산본부 본부장으로 선출되었다.

2005년 4월 - 13기 민투위 비정규직 부장인 허성관 동지가 금속연맹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2005년 12월 - 12대 임원선거 투쟁에 민투위 후보로 위원장 강성신, 수석부위원장 윤해모, 보위원장 고도일, 김동원, 조창민, 사무국장 박성식 동지가 출마하였다. 12대 집행부에 민노회 박유기 동지가 당선되었다.

 

2006년 2월 - 14기 민투위가 출범했다. 의장 윤해모, 부의장 조창민, 주재일, 사무장 이경호 동지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2006년 6월 - 현자노조는 산별전환 총회를 통해 조합원 3/2를 넘기는 찬성(71.54%)으로 산별노조로 전환했다. 이로써 역서적인 기업별노조의 장을 마감하고 금속산별노조로 출발을 시작했다.

2006년 11월 - 사무장 이경호 동지가 신병으로 인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사퇴하고 사무차장에 권병석 동지가 선임되었다.

 

2007년 1월 - 민주노총 임원선거에 여성부위원장 후보로 정영자(민투위) 동지가 출마했다. 좌파후보로 위원장에 조희주, 사무총장에 임두혁 동지가 출마했다.

 

2007년 2월 - 임시총회를 통해 14기 의장단 및 중앙집행위의 임기를 제1대 현자지부 임원선거 및 사업부위원회 대표선거 종료시점으로 연장하고 선거종료 후 1개월 이내에 15기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금속노조 위원장 선거투쟁에 좌파후보로 위원장 이정행, 수석부위원장 전규석(민투위), 사무국장 최윤정, 일반부위원장 김일섭, 허성관(민투위) 동지가 출마하여 김일섭 동지가 당선되었다.

 

2007년 3월 - 12대 박유기 집행부의 노동조합 창립기념품 관련 비리로 중도사퇴하고 조기선거가 진행되었다. 12대 집행부 잔여임기를 집행하는 보궐선거이지만 역사적인 금속노조 현자지부 초대지부장 선거이기에 민투위는 힘차게 결합했다.

금속노조 현자지부 1대 지부장 선거투쟁에 민투위 후보로 지부장 이상욱, 수석부지부장 윤해모, 부지부장 김동원, 손덕헌, 조창민, 사무국장 박성식 동지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7년 4월- 현자지부 제1대 사업부위원회 대표선거에 엔진사업부 백운호 동지가 출마해 당선되었다.

2007년 5월 - 15기 민투위 정기총회에서 의장 강성신, 부의장 최용원, 최윤석, 정창봉, 사무장 최낙현 동지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 7월 - 양남 해수랜드에서 민투위 통합수련회를 열었다.

2007년 12월 - 현자지부 2대 임원선거에 지부장 윤해모, 수석부지부장 김태곤, 부지부장 정창봉, 김종일, 주인구, 사무국장 조창민 동지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8년 2월 - 현자지부 2대 사업부위원회 대표선거에 1공장 진윤식, 2공장 정진수, 3공장 허성관, 4공장 최정열, 엔진 최용원, 통합 강재구 동지가 출마하여 3공장 허성관, 4공장 최정열 동지가 당선되었다.

2008년 2월 - 16기 민투위 정기총회에서 의장 전규석, 부의장 최용원 최윤석 허성관. 사무장 조현균 동지가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2008년 3월 - 금속민투위 사무실에 화재가 발생 하였다.

 

2008년 3월 - 직선5기 사주조합 조합장선거에 조합장 이상욱 사무장에 김동원 후보가 출마하여 아쉽게 낙선하였다.

2008년 11월 - 08투쟁 관련하여 16기 의장단이 총사퇴하고 17기 의장단에 의장 손덕헌. 부의장 백운호 진윤식 최낙현. 사무장 조현균 동지가 선출되었다.

 

2009년 3월 - 18기 의장단에 의장 조용래, 부의장 김진수, 김채규, 백운탁, 사무장 최낙현 동지가 선출되었다.

 

2009년 6월 - 조창민 사부장이 3공장 물량이관 관련으로 3공장 총회에서 징계가 발의 되어 조직에서 제명되었다. 윤해모 지부장이 09년 단체교섭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중도에 사퇴하였다. 하지만 조기선거와 관련된 비대위체계냐 아니냐의 논란과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에 공권력이 침탈하는 등 긴박한 투쟁일정 등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2009년 7월 - 09년 단체교섭 포기와 중도사퇴로 인한 현자지부 혼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윤해모, 김태곤 동지를 조직에서 제명하고, 정창봉 동지는 정권4개월로 징계했다.

2009년 9월 - 지부장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금속민투위는 지부장의 무책임한 사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현자지부 3대 지부장에 이경훈 후보가 당선되었다. 금속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박유기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9년 10월 - 현자지부 제4대 사업부위원회 대표 및 대의원 선거에 금속민투위는 적극 결합하였다. 사업부대표로 1공장 강성신, 2공장 정진수, 3공장 임병우, 4공장 최정열, 엔진 백운호, 소재생기 조강훈 동지가 출마했다.

2009년 11월 - 감사후보에 손덕헌 동지가 출마했고, 12월 금속노조 부위원장 보충 선거에서 금속민투위 김봉윤 동지가 당선되었다.

 

2010년 1월 - 민주노총 임원선거에서 좌파후보로 위원장 허영구, 사무총장 이정행, 부위원장 양동규 동지가 출마했다.

금속민투위 역대 의장단 ( ) 안은 현재 조직원 아님

 

기수

년도

의장

부의장

사무장

1기

1995년

(정갑득)

(김경석)

(배만수)

2기

1995년

(김경석)

(황종하)

(채규정)

3기

1996년

(이재인)

(황치수)

(김영배)

4기

1997년

(배만수)

이덕기(퇴사)

홍영기(퇴사)

5기

1998년

이상욱

지진성

(김주희)

6기

1998년

(하수봉)

(심재근)

홍용구

7기

1999년

전규석

유홍렬

(김태곤)

8기

1999년

전규석

(강병태)

(김태곤)

9기

2001년

강성신

(김기수)

김기선

10기

2001년

강성신

허성관

(김기수)

11기

2002년

(김태곤)

허성관, (박상철)

김기선

12기

2003년

허성관

주재일, 최윤석

전규석, 사무차장 이경호

13기

2004년

강성신

고도일, (윤해모)

권병석

14기

2006년

(윤해모)

주재일, (조창민)

이경호, 사무차장 권병석

15기

2007년

강성신

정창봉, 최용원, 최윤석

최낙현

16기

2008년

전규석

최용원, 최윤석, 허성관

조현균

17기

2008년

손덕헌

백운호, 진윤식, 최낙현

조현균

18기

2009년

조용래

김진수, 김채규, 백운탁

최낙현

19기

2010년

손덕헌

백운탁, 최용원, 이관호

천동욱

20기

2011년

전규석

김진수, 이현수, 이관호

김민수